초미세 반도체의 시대, 그 뒤엔 ‘EUV’가 있다
1. 반도체, 더 작게 더 빠르게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노트북, 자동차, AI 서버는 모두 반도체로 작동합니다. 그리고 반도체는 해마다 작고 정밀하게 진화해 왔습니다. 흔히 말하는 ‘나노미터 공정’은 반도체 회로의 미세화 정도를 말하며, 공정이 작을수록 성능은 올라가고 전력 소모는 줄어듭니다.
이 미세공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노광(露光, Lithography)**입니다. 이는 웨이퍼 위에 회로 패턴을 광(光)을 이용해 새기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10나노미터 이하의 극초미세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 꼭 필요한 장비가 있습니다. 바로 EUV(Extreme Ultraviolet) 노광장비입니다.
2. EUV 노광장비란 무엇인가?
EUV 노광장비는 Extreme Ultraviolet, 즉 **극자외선(파장 13.5나노미터)**을 이용해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장비입니다. 기존 DUV(Deep Ultraviolet) 장비가 사용하는 자외선의 파장이 약 193nm였던 것에 비해, EUV는 약 14배 더 짧은 파장을 사용합니다.
짧은 파장은 더 정밀한 회로를 그릴 수 있게 해주며, 이는 곧 더 작고 빠른 반도체 칩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5나노, 3나노 공정은 EUV 없이는 구현할 수 없습니다.
3. 기존 노광 방식과 무엇이 다른가?
DUV 장비는 파장이 길기 때문에 초미세 회로를 구현하려면 **복수 번의 공정(Multi-Patterning)**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오차 발생 가능성도 컸습니다. 반면 EUV는 한 번의 공정으로 더 정밀한 패턴을 구현할 수 있어 공정 수를 줄이고 수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구분 DUV (193nm) EUV (13.5nm)
파장 | 긴 자외선 | 극자외선 |
공정 방식 | 멀티 패터닝 | 싱글 패터닝 가능 |
공정 속도 | 느림 | 상대적으로 빠름 |
오차율 | 높음 | 낮음 |
가격 | 비교적 저렴 | 매우 고가 |
4. 세계에서 단 하나, ASML
EUV 장비를 만들 수 있는 회사는 전 세계에서 단 한 곳, 네덜란드의 ASML입니다. 이 회사는 약 20년 이상 EUV 기술을 개발해왔고, 지금은 사실상 독점 공급자로서 위치를 굳혔습니다. 한 대의 EUV 장비 가격은 **약 2억~3억 달러(3000억 원 이상)**에 달하며, 주문 후 생산과 설치까지 2년 이상 걸리기도 합니다.
ASML의 EUV 장비는 단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독일의 Zeiss가 렌즈를 공급하고, 일본의 미쓰비시와 미국의 Cymer가 레이저 기술을 지원하는 등 수십 개 기업의 초정밀 기술 협업의 결과입니다.
5. 누가 이 장비를 쓰는가?
EUV 장비는 워낙 고가이며, 이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공정 기술을 가진 곳도 매우 제한적입니다. 현재 EUV 장비를 사용하는 주요 기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 TSMC (대만): 3나노, 5나노 양산에 EUV 적극 활용 중
- 삼성전자 (한국): EUV 기반 3나노 GAA(게이트 올 어라운드) 공정 세계 최초 적용
- 인텔 (미국): 2024년부터 본격 도입, TSMC와 삼성에 맞불 전략
특히 삼성전자는 2020년 세계 최초로 EUV를 적용한 7나노 공정 양산에 성공하며 이 시장에서 선두주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3나노 GAA 공정까지 확대하여, EUV 활용을 더욱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6. 한국의 전략적 포지션과 과제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세계 반도체 산업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EUV 장비는 ASML이 독점 공급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기업들도 장비 수급에 있어 외부 의존도가 높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와 업계는 다음과 같은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 EUV 장비 추가 확보: 장기 계약을 통해 안정적 공급 확보
- 포토레지스트 등 소재 국산화: 일본 수출 규제 이후 핵심 전략으로 부상
- EUV 마스크 기술 개발: 반사 마스크와 검사용 장비 기술 자립화
- 전문 인력 양성: EUV 전용 공정, 유지보수 인력 부족에 대응
한국은 단순히 장비를 들여오는 수준을 넘어, EUV 생태계의 일부를 내재화하고자 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습니다.
7. 미래 전망: 2나노, 1.4나노, 그리고 Beyond
EUV는 이제 5나노, 3나노 공정에서 핵심이 되었고, 앞으로 2나노, 1.4나노까지의 공정 개발에도 중심 기술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 장비 가격의 급등
- 마스크 제작의 난이도 증가
- 공정의 열 안정성 확보 문제
이에 따라 ASML은 차세대 기술인 High-NA EUV(고 개구수 EUV) 장비를 2025년 이후 양산할 계획이며, 삼성전자와 인텔 등이 이미 초기 테스트에 참여 중입니다.
8. 결론: 미래 반도체는 ‘빛’으로 싸운다
EUV는 단순한 장비가 아니라, 차세대 반도체의 가능성을 여는 열쇠입니다. 기술, 경제, 안보 측면에서도 이 장비는 더 이상 민간 수준의 자산이 아닙니다. 반도체 패권을 놓고 벌어지는 글로벌 경쟁 속에서, EUV 장비는 핵심 전략 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제 반도체 산업의 경쟁은 나노미터 단위가 아니라 ‘광’의 파장을 줄이는 경쟁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엔, EUV가 있습니다.